회사에서 20년을 일하면서도 정작 제가 몸담은 철강산업의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 철강산업 하면 1970년대 포항제철만 떠올리는데,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산업사 강의를 접하면서 우리 철강산업의 시작이 일제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17년 미쓰비시가 황해도에 세운 겸이포제철소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였습니다. 일본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식민지형 제철소였지만, 이것이 우리 철강산업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기도 했습니다.
일제시기 철강산업의 식민성과 근대성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제시기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1917년 황해도 송림면에 세워진 겸이포제철소는 일본 재벌 미쓰비시가 건설한 근대식 제철소였습니다. 당시는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화가 본격화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과 농업 정책에 집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거대한 제철소가 조선 땅에 들어섰을까요? 인근 황해도 재령, 은율 광산에서 양질의 철광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겸이포제철소에서 생산된 철강재가 전량 일본으로 반출되어 미쓰비시중공업의 선박 건조에 사용되었습니다. 식민지 조선 경제와는 원료인 철광석 정도만 연결되어 있을 뿐, 완전히 일본 본토 산업을 위한 생산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근대성과 식민성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근대적 제철 기술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분명 산업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철저하게 일본의 일방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본의 대륙침략과 맞물려 함경북도 무산의 철광산 개발과 청진제철소 건설이 이어졌습니다. 전시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철강산업은 군수물자 증산을 위한 초중점 산업으로 자리 잡았고, 경제성을 무시한 채 소형 용광로 제철사업까지 추진되었습니다.
철강산업의 핵심 공정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전문 용어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제선(製銑)은 철광석으로부터 선철을 만드는 공정을 말합니다. 여기서 선철이란 용광로에서 철광석을 녹여 만든 중간재로, 탄소 함유량이 높아 그 자체로는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단계인 제강(製鋼)은 선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강철을 만드는 공정입니다. 쉽게 말해 제선은 '철 덩어리 만들기', 제강은 '쓸 수 있는 강철 만들기'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압연(壓延)은 강철을 눌러서 철근, 코일, 강관 등 다양한 형태의 완제품 강재로 가공하는 공정입니다. 사실, 입사 후 철강에 대한 역사를 짧게 교육을 받지만, 이런 것까지는 잘 몰랐습니다. 제가 아는 포항제철이 처음 철강회사가 아니었다는 것이 새롭습니다.

해방 이후 자립경제를 향한 노력
해방 후 한국 철강산업은 엄청난 시련을 겼습니다. 일본이 물러가면서 자본과 기술의 공백이 발생했고, 남북분단으로 주요 제철소들이 북한 지역에 남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남아있던 시설마저 파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권은 '자립경제'라는 목표 아래 종합제철소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가난한 나라가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철강산업에 매달렸을까요?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이라 불립니다. 여기서 '산업의 쌀'이란 다른 모든 산업에 기초 소재를 공급하는 핵심 산업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동차, 조선, 건설, 기계, 전자 등 전방 산업이 모두 철강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철강산업 없이는 진정한 산업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좌절했습니다. 1960년대 전반기에는 '철강공업육성종합계획'과 인천중공업주식회사의 일관제철소 건설 시도가 있었지만 이 역시 실패했습니다. 제가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느낀 점은 일관제철소(一貫製鐵所)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입니다. 일관제철소란 제선-제강-압연의 3개 공정을 모두 갖춘 대규모 종합 제철소를 말합니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과 안정적인 원료 공급망, 그리고 고도의 기술력이 모두 필요한 거대 장치산업이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후반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을 통한 건설 시도도 실패로 끝났고, 결국 1969년부터 일본의 협력을 얻어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게 됩니다. 한일 양국이 국익을 놓고 치열하게 부딪힌 경제외교 끝에 1970년대 포항제철 1기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03만 톤 규모로 출발한 포항제철은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후 4기까지 연속적으로 설비를 증설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20년간 일하면서 배운 것은 철강산업이 단순히 철을 만드는 산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포항제철이 채택한 전로제강법(轉爐製鋼法)은 고로에서 나온 쇳물을 그대로 전로로 옮겨 강철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전로제강법이란 연속주조 방식으로 평로제강법보다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하는 현대적 제강 기술을 의미합니다. 이 기술 덕분에 포항제철은 세계 수준의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광양제철소가 건설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철강업계 재편이 이루어졌습니다. 한보철강 사태와 같은 위기도 있었지만, 현대제철의 탄생 등 새로운 변화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전기로제강법(電氣爐製鋼法)을 활용한 제강회사들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전기로제강법이란 고철을 전기로에서 용해하여 강철을 만드는 방식으로, 초기 투자비가 적고 환경친화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주요 철강산업 발전 단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17년: 겸이포제철소 건설 (일제시기 식민지형 제철소)
- 1930년대: 청진제철소 등 군수산업형 확대
- 1970년대: 포항제철 건설 시작 (자립경제형 종합제철소)
- 1980년대: 광양제철소 건설 (설비 확장기)
- 1990년대 이후: 민간 철강업체 성장 및 산업 재편기
저는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우리 철강산업이 단순히 경제적 성과만이 아니라 자립과 도전의 역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제시기 식민지형 제철소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자본과 기술의 공백, 한국전쟁의 파괴를 딛고 결국 세계 수준의 철강산업을 일궈낸 과정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고층 빌딩에서 일하며 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모두 철강산업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철강산업은 과잉 생산과 환경 규제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100년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철강산업은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바꿔왔습니다. 단순한 근로자가 아닌 이 산업의 역사를 이해하는 엔지니어로서 저는 앞으로도 철강산업이 한국 경제의 든든한 뿌리로 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 한국 철강 산업 발전사 1-1(History of Steel Industry Development in Korea 1-1)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MF4oeQJZZSo
- 한국 철강 산업 발전사 1-2(History of Steel Industry Development in Korea 1-2)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dzKLg8nCR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