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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인물을 이야기 하다.

by 하이파이브 2024. 9. 24.

1. 세계 속의 정복자와 폭군

  우리는 역사 속 큰 영토를 차지한 알렉산드로스를 기억합니다. 후에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로스가 왔던 곳보다 더 넓게 정복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어머니의 기대 또한 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아버지가 죽자 2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 알렉산드로스는 대군을 물리치며 이집트까지 정복합니다. 정복의 왕이었던 그는 33세의 나이에 고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동서양의 문화를 이끌어 냈으며 헬레니즘이라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정복자는 중국의 진시황제입니다. 진시황제는 5천 년의 길고 긴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천하통일을 했습니다. 진시황제가 다스린 진나라가 지금의 China 명칭을 만들었습니다. 타국의 볼모로 잡혀간 왕자의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운명이었습니다. 진시황은 유능한 인재라면 나라에 관계없이 인재로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법치주의를 내세워 강력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중국은 전국시대로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문자, 화폐, 제도, 법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진시황제는 이를 통일하였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진시황제는 점점 절대권력을 위해 폭정을 하기 시작하였고, 만리장성을 무리하게 쌓기 시작했습니다. 포악하여 남에게 묻지 않았고,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았다고 후대 역사가는 기록합니다. 이제는 로마의 폭군이었던 네로왕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고 시민의 편의를 위해 공공건설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최악의 폭군이며, 어머니를 죽였고, 그리스도교도를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역사 속 또 다른 정복자이자 무법자는 몽골제국의 칭기스 칸입니다. 그는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악마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그 힘의 원천은 복수였습니다. 아버지가 독살당하고 아내는 납치당하고 친척들의 배신으로 포로생활을 했던 칭기즈 칸은 고난 속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칭기즈칸은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대신 자신과 함께 싸운 부하들과 나누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덕에 칭기즈칸을 따르는 자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으며, 아직도 무덤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고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는 전쟁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했고 몽골제국은 약 20개국을 지배하였습니다. 

 

2. 신이 되고 싶은 태양왕 루이 14세

 프랑스 왕이라고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왕이 루이 14세입니다. 그는 77세까지 장수하였고,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렸습니다. 오랜 재위동안 정치, 경제, 행정, 산업에 관여했고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만들었습니다. 루이 14세는 5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어린 왕을 대신해 모후 안 도트리슈와 재상 쥘 마라 쟁이 국정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작은 반란들이 계속 일어났고 피난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억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누구보다도 강한 왕이 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태양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절대적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귀족을 단속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태양왕의 무대는 베르사유 궁전이었습니다. 귀족을 온순한 양으로 길들이기 위해 둘레가 44km, 450개의 방을 가진 궁전을 짓습니다.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한 귀족들은 더욱 치장을 했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전쟁을 통해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재정이 어려워졌고,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신교를 금지하였습니다. 고문과 박해로 잔인한 종교탄압을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노인으로 생을 마감한 루이 14세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3. 혁명가여, 황제가 되고 싶은 나폴레옹

 프랑스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을 지배하였으며, 프랑스 영향권 아래 두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다릅니다.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난 그는 특유의 억양으로 항상 놀림을 받았고, 책을 좋아하는 외톨이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의 걸림돌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당시의 프랑스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인플레이션이 심하여 경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나폴레옹은 등장하였고, 나폴레옹은 영국군으로부터 툴롱항을 되찾아오는 임무를 수행했고, 공을 세워 초고속 승진을 합니다. 리볼리 전토에서 혁명의 최대 적이자 적대관계인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돌아온 나폴레옹은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 다른 업적은 법전 편찬입니다. 단일한 사법체계인 나폴레옹 법전을 만들었고 이는 세계 3대 법전으로 평가받습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싶었고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은 점점 포악해지고 자신의 야망과 정복욕을 채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군과 프로이센 군에게 패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혁명을 반대하는 부르봉 왕가가 다시 집권하게 됩니다. 지나친 욕심과 야망으로 몰락의 길로 들어선 나폴레옹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수많은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나폴레옹은 없었을 거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4. 미국의 남북전쟁과 링컨

 우리가 기억하는 링컨은 과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위대한 해방자로 불리는 노예해방의 영웅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흑인 노예를 차별했던 인종 차별주의자였는지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링컨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삶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링컨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고 합니다. 사업이 망해 17년 동안 빚을 갚아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23세 누구의 도움 없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당시 미국은 남북이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1619년 시작된 노예거래는 1863년 노예해방이 선포되기까지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심지어 노예를 사고파는 경매도 생겼습니다. 농업 중심의 남부는 노예가 더더욱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북부는 산업화되면서 노예보다는 기술자들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흑인노예들의 삶은 점점 비참했습니다. 남부와 북부의 차이는 점차 정치적인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하고 대통령 선거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이때 링컨의 연설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그는 연설에서 만인의 평등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남북 통합이 우선이라 판단하였습니다. 결국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북부가 승리하게 되었으며 그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링컨을 통해서 편견과 차별을 가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